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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가난한 유학생에서 호주변호사가 되기까지 윤수용 변호사

2016년 9월 7일

yoon

1 이번에 “앞서가는 한국인” 이라는 책을 내셨는데요. 어떻게 출판하게 되셨나요?

호주 퍼스에 처음 왔던 때가 1987년이었습니다. 유학생으로 시작해서 그간 줄곧 퍼스에서 살아왔어요. 아이들 교육 문제나 사업 때문에 간간히 한국에 머무를 때도 있었지만, 금방 퍼스로 다시 돌아오곤 했죠. 한국에서 퍼스로 돌아오는그 길고 긴 여정 속에서 제 자신이 마치 고향의 강으로 돌아가는 연어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만큼 퍼스라는 도시는 제게 각별하고 의미가 깊습니다.

제 인생에서 퍼스는 참 특별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교민분들의 따듯한 정 때문인 것 같습니다. 유학생으로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정말 많은 교민 분들이 저희 부부를 도와주셨는데요, 그 중에서도 지의상 장로님 내외 분이 저희를 각별히 챙겨주셨어요. 너무 감사하죠.

가난한 유학생 시절에 태어난 저의 첫 아이를 위해, 옷이며 아이 침대 할 것 없이 온갖 유아용품들을 다 챙겨주시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간식거리는 물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식사 초대를 해주셨어요. 정말 많은 배려와 보살핌을 받았는데 송구스럽게도 은혜를 갚을 기회가 많지 않았네요.

퍼스 교민 분들께 받았던 따듯한 관심과 애정을 저도 언젠가는 베풀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왔어요. ‘앞서가는 한국인’이라는 책을 쓰고 무료로 배포하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30여 년간 호주에 거주하면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초기 이민자 분들을 비롯한 다양한 한인 분들과 공유하여 퍼스 교민 사회에 아주 작게나마 보탬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yoon_book2 “앞서가는 한국인”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한국의 법 시스템이 호주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하시는 교민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한국적 법리만을 가지고 호주에서 발생하는 분쟁사항들을 섣불리 판단하여 포기하는 교민들도 많고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자살을 시도했다가, 한 사람만 살아나면 한국에서는 생존자를 자살방조죄로 처벌합니다. 하지만 호주에서는 형법상, 생존자를 처벌할 법이 없기 때문에 생존자는 무죄입니다. 또 한국에서 빈번한 고소고발건중 하나인 명예훼손의 경우 한국에서는 사실을 말해도 처벌을 받고 거짓을 말하면 가중 처벌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렇지만 호주에서는 사실을 말한 것이라면 명예훼손에 해당되지 않아요. 이밖에도 ‘앞서가는 한국인’에는 운전, 근로, 채무, 이혼, 범죄 등에 관한 호주법들을 한국법과 비교하면서 설명하고 있어 한국과 호주의 법적 차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3 “앞서가는 한국인” 출간 전에도 다른 책을 저술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책을 저술하셨나요?

컴퓨터 소프트웨어 사업을 할 당시인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유니클”,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소프트웨어 포너”, “몽당연필”등 다수의 컴퓨터 소프트웨어 관련 서적 및 소프트웨어 매뉴얼을 저술한 바 있습니다. 또한 2001년경에는 eBook으로 “하나님을 조종하는 리모콘”이란 신앙서적도 발간한 적이 있습니다. 2008년경에 “내가 본 한국과 호주”라는 제목의 자서전적 에세이를 한국에서 발간한 바 있습니다.

4 변호사님의 자서전을 보면 어린시절 많은 일을 하신것으로 묘사되어 있던데요?

네. 어릴 때 집안 형편이 시쳇말로, 찢어지게 가난했어요. 아버지는 섬의 작은 교회에서 현물을 받으면서 목회를 하셨어요. 학교반장도 하면서 초등학교까지는 무사히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에서 준비해 오라는 것을 살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기술시간에는 제도기를 준비해오지 않아서 벌을 서고, 미술시간에는 파스텔을 준비해 오지 않아 벌을 세우고, 나중에는 기성회비가 미납되었다고, 집으로 도로 돌려 보내더라구요. 이건 뭐 학교에 공부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벌 서러 가는 꼴이었죠. 학교 가는 것이 싫어졌어요.

그래서 가정형편도 어려운데 차라리 돈이나 버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해서 그 길로 신문파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닦이 같은 일들은 저와 같이 어려운 가정형편에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아이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하는 일이었죠. “나는 하나님이 선택한 의로운 사람”이라는 믿음 하나로 버티던 시절이었습니다.

5 한국에서 경찰관 생활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예, 맞습니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약 5년간 한국 외사경찰관으로 근무했었어요. 당시 옆 책상에서 근무하던 동료 형사가 현재는 제 아내입니다. (웃음) 결혼 당시 유학을 가고 싶다고 아내에게 이야기 하자, 흔쾌히 동의해주었고, 그때부터 경찰관 재직중 틈틈히 유학 준비를 했어요. 당시 한국은 일반인들이 여권을 쉽게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처럼 개인적으로 유학을 가기가 거의 불가능했었죠. 그런데 뜻밖에도 전두환 정권에서 제도개혁을 하여, 자비유학자격시험에 합격하면 누구에게나 여권을 주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시험을 치르고 합격해 여권을 받았죠. 그런데 이듬해 2회 시험을 끝으로 자비유학자격시험은 정지가 되었어요. 알고보니 그 시험 제도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아들에게 여권을 주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만든 거라고 하더군요. 운이 좋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든, 한국에서 경찰관직에 있었던 경험은 호주에서 변호사 업무를 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6 제가 듣기론 예전에 신학 공부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예, 한국의 장로교 교회의 목사님이셨던 아버지가 제가 태어날 무렵, 저를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서원기도를 하셨다고 하더라구요. 그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살면서 저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호주 유학오기 전, 부산신학교 2년 과정을 수료했고, 1994년부터 호주의 Murdoch University와 Baptist Union이 연계한 Bachelor of Divinity 과정을 3년간 공부하였습니다.

마지막 학기에 Baptist Union에서 목사 후보 자격을 심사하기 위한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저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까지 장장 7시간동안 Baptist Union 목사님 10여분들과 한명씩 돌아가면서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분위기는 무척 좋았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아버지가 장로교 목사인데 어떻게 침례교 목사가 되려고 하느냐?” 저는 종파가 중요한 것이 아니어서 개인적으로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고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그렇다면 장로교에서는 세례를 주는 반면 침례교에선 침례를 받아야 하는데 이 침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세례나 침례나 모두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에 저에겐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인터뷰가 끝나고, 몇 주뒤 심사 결과통지서가 날아 왔는데 다소 충격적이었습니다. “침례교의 가장 핵심 교리는 침례인데 침례교 목사 후보로서 이러한 핵심 교리에 대한 믿음이 약하므로 Baptist Union에서 지정한 침례교 핵심교리과정을 6개월간 이수하면 목사후보에서 정식 목사자격을 인정하겠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현재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듣기에 조금 거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당시에 “내가 침례교 목사가 된다는 것은 곧 침례교 앞잡이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회의가 몰려 오더군요.

이때 마침 한국, 미국, 홍콩에 사업체를 가지고 있던 코스코 전자 사장님께서 미국 100대 기업에 들어 있는 Avenet Group 과 합병하고자 하니 합병협상 대표로 저를 임명하고 싶다고 해서 이것이 하나님께서 신학교를 그만두고 경제활동을 하라는 메시지로 해석하고 1998년 가족들을 데리고 그대로 한국으로 역이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7 변호사님 자서전에 보면 변호사가 되기 전 이란에서도 생활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란에는 어떻게 가셨나요?

한국에서 코스코전자와 Avent Group 합병을 성공시켜 아브넷코리아 주식회사를 설립했어요. 당시 한국 모토롤러 사장이 초대 사장으로 영입되었고 저는 전략기획이사로 일을 하게 되었죠. 회사 내에서 실권도 갖고, 근무환경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어요. 그런데 1년 간 일을 하다보니 권태기가 찾아들더라고요.

한번 뿐인 인생인데 이렇게 사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느낌이 들어 당시 열풍이던 벤처사업에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리를 사표 내고, 아소텍 주식회사라는 소프트웨어 벤처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여기에 합병사례금으로 받은 돈을 모두 투자하였는데, 2년만에 투자금 대부분을 잃었어요. 그러면서 마지막 시도를 해 본답시고, 당시 주목을 받던 바이오테크놀러지 사업에도 손을 뻗쳤어요. 당시 대전에 있던 베스트코리아라는 회사와 손을 잡고 바이오리엑터를 생산하여 인도 등지에 판매했어요.

그러다 이란 정부와 기술협략이 체결되어 베스트코리아와는 결별하고, 아예 이란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계약금도 제때 지불하고 신뢰가 갔어요. 그런데 직원들을 데리고 이란에 체류하게 되자 계약된 기술료를 차일피일 미루는 것입니다. 이때 미지급금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지 당시 이란에 있던 한국대사관에 문의 하였더니, 이란이란 나라는 마치 북한과도 같은 집단이고 이란내에서는 미지급금을 강제로 받기란 어렵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오히려 이란측에서 계약위반으로 무슨짓을 할 지 모르기 때문에 몸만 성히 빠져 나와도 다행이라고 조언해 주어 당시 상당한 금액의 미지급을 모두 포기하고 미련없이 이란에서 철수하였습니다. 이때가2004년 초반 경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김선일 선교사가 이라크에서 참수를 당하던 때였으니 아내도 돈 받지 않고 몸만 성히 돌아 온건만도 감사하다고 하더군요.

8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한가요?

사람이 사는 의미가 무엇인가 항상 고민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는 동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의무를 성실히 다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 일환으로 저의 경험과 지식, 깨달음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워홀러들을 위한 호주생활 정착 가이드”를 퍼스마당에 기고하고있고, 교민들을 위한 법률 칼럼도 꾸준하게 써오고있습니다. 또한,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고 계신 한국 교민들을 위한 자문 변호사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퍼스마당에서도 공식 자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어요. 앞으로 퍼스마당의 더욱 신뢰있고 든든한 법률 조언가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예정입니다.

작은 계획이 있다면 적어도 1-2년에 한번 정도는 호주 이민 생활의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책자를 시리즈로 발간하여 무료 배포하고 싶습니다. 책을 만든다는 것이 손도 많이 갈 뿐만 아니라 비용 문제도 만만치 않지만, 교민들이 좋아해주시고 도움이 된다면 열심히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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